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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 내면화된 타인의 확신

 

 

에리크 베르네는 최초의 깊은 상처를 기초 상처라고 부릅니다. 초기의 자아 도취, 즉 아이의 자기애를 상처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발랄함과 적응성, 자존감 등을 망가뜨리는 부정적 메시지들은 모두 이 기초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넌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하니"라든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라" 같은 말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네 느낌에 귀기울이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비단 말로 표현된 문장뿐만 아니라 언어가 아닌 신호도 그러합니다. 말없이 전달되는 이 신호들도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엄한 눈길, 그리고 때로는 벌칙조차도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엄격함을 풍기는 음성의 억양이나 모른체 하기, 아이에게 '너는 제대로 되지 않았어'라는 뜻으로 느껴지는 외면하는 몸짓도 그런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체험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여 이른바 '내사 introjection'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내사'라는 개념은 게슈탈트 심리 치료에서 나온 겁니다. 어떠한 메시지가 동화되지 못하거나 씹지 않은 채 삼켜지면서 내면화될 때 이것을 내사라고 하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내사는 신념이 되어 아이에게 할 일, 못할 일을 정해주지만, 정작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사를 통해 당사자의 성향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관과 인간관까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들은 나를 착취만 하니까 절대로 남을 너무 믿지 말 것,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내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이 세상은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전해주는 내사도 있습니다.

 

프리츠 펄스는 이렇게 내사 성향이 농후한 사람들을 '치아 장애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면에서도 치아의 기능에 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 미리 다 잘 씹어진 상태로 받고 싶어하고, 남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즉 스스로는 그것을 한번도 검토해보지 않은 상태로 그냥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에 이상이 있든가, 아니면 씹는 수고를 아끼려는 것이지요. 그들은 남이 자기에게 말하는 내용을 자기에게 맞는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삼켜'버립니다. 다시 말해, 비판력이 없고 남의 영향을 받거나 설득되기 쉬운 사람이지요. 어떤 의견이 지배적인지를 알아내어 거기에다 자기를 맞출 뿐, 그 밖에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를 묻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감정은 점점 더 상실되어 갑니다. 이들은 자기 몫으로 주어지는 것이면 맛이 있든 없든 무조건 가져갑니다.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따귀 맞은 영혼] 중에서...

 

 

독일의 심리 상담가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쉽게 상처받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내사'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해 놓은 부분입니다. 여기서 '치아 장애자'라는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이빨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씹는 것이 귀찮아서' 남이 씹어서 주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인데, '내사'를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남에게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내사'를 주요 심리기제로 가지고 있는 분들은 화가 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쁜 말을 듣는 것이지 상대의 판단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핀잔을 듣고 반박을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내사'가 꼭 필요할 때도 많습니다. 좋은 가치를 받아들일 때, '내사'의 과정을 거쳐야 개인에게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튼튼한 이빨'이 있어야 외부의 것을 자신에게 맞는 상태로 만들어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쓴 것도 제대로 소화만 시킨다면 이롭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쓰다고 해서 무조건 뱉는 것은 '투사'라고 부릅니다.

 

반면 전혀 영양가가 없는 말들도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상대는 '도움되라고 던진 말'이지만, 나에겐 상처만 될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말들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별하려면 나만의 기준과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죠. 그것이 바로 '튼튼한 이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의숲 심리상담센터

원장 박 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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