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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한 성격'이 놓치는 것들

9월 6일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9월 13일


선택을 미루는 일은 대개 눈에 띄는 사건이 아닙니다. 크게 잘못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 조용히, 더 오래 지속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결정을 미루어 온 시간들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무엇을 가져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미뤄진 선택들이 조용히 쌓이는 방식


선택을 미룰 때 우리는 흔히 '나중에 더 좋은 상황에서, 더 확신이 생겼을 때 결정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나중'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확신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뤄 둔 선택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편에 그대로 쌓입니다.


이직을 고민하다 미룬 지 삼 년째인 분,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년째 같은 관계에 머물러 있는 분, 배우고 싶었던 것을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미뤄 온 분들을 만납니다. 이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정을 안 한 거지, 포기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미뤄진 선택은 조용히 쌓이면서 무게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여도, 쌓인 미결정들은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 자체가, 서서히 삶을 짓누르는 배경음이 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결정을 맡기는 습관과 자기 신뢰의 침식


선택이 어려운 분들은 종종 누군가에게 결정을 맡기는 방식으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려 합니다.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심리검사 결과에, 때로는 점이나 운세에 중요한 결정을 위임합니다. 이렇게 하면 당장의 불안은 줄어듭니다. 선택의 책임이 나에게서 잠시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패턴이 반복될수록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깎여 나간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신뢰라는 것은 원래 갖고 태어나는 성격 특성이 아니라, '내가 선택했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 봤다'는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선택을 계속 타인에게 넘기면 이 경험을 쌓을 기회 자체가 줄어듭니다. 그러면 다음 선택은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또 남에게 맡기게 되고, 자기 신뢰는 또 한 번 깎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과 타인에게 의존하는 습관은 서로를 강화하며 악순환을 만들어 갑니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우유부단함 ("아무거나 괜찮아"의 이면)


이러한 패턴은 관계 안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녁 뭐 먹을까?"라는 물음에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답하는 모습은 흔히 배려나 무던함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상담에서 만나는 많은 경우 이 대답 뒤에는 조금 다른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내 선호를 드러냈다가 거절당하거나 실망시킬까 봐 두려운 마음, 혹은 애초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런 방식이 반복되면 관계 안에서 묘한 불균형이 생깁니다. 한쪽은 늘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지고, 다른 한쪽은 그 결정을 따르기만 하는 자리에 머뭅니다. 처음에는 편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정을 도맡은 쪽은 지치고, 결정을 미루는 쪽은 '나는 이 관계에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쌓아 갑니다. "아무거나 괜찮아"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정작 상대는 나를 잘 알지 못하게 되고 나 역시 나 자신을 더 알기 어려워지는 역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선택되고 있는 것들


여기서 꼭 짚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선택을 미루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정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에도, 삶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이직을 미루는 동안 지금의 직장에 머무는 것이 사실상 선택되고 있는 것이고, 관계를 정리할지 고민만 하는 동안 그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이미 선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택을 피할 수는 있어도, 선택의 결과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결정하지 않아서'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 앞에서는 후회조차 온전히 내 몫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된 일도 온전히 내 성취로 느끼기 어렵고, 잘못된 일도 누구의 책임인지 모호해집니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다시 '나는 내 삶에 대한 통제감이 부족하다'는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들이 우리 삶에서 실제로 무엇을 가져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조용히 쌓여 가는 미결정의 무게, 타인에게 결정을 맡기며 서서히 깎이는 자기 신뢰,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아무거나 괜찮아"의 이면, 그리고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다른 무언가가 선택되고 있다는 사실까지—이 모든 것은 결국 삶의 방향키를 스스로 쥐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이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신뢰가 경험을 통해 깎여 왔다면, 같은 방식으로 다시 쌓아 갈 수도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완벽한 선택이라는 환상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아주 작은 선택들로 다시 연습을 시작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선택을 다시 배워 가는 과정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마음의숲 심리상담센터

원 장 박 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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